집안의 제사를 장남이 꼭 지내야 할까요?
오늘은 우리가 명절이나 돌아가신날 지내는 제사,
이 제사를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지 않고 대부분이 장남이 지내고 있는데요.
꼭 장남이 지내야하는지에 대해 한번 같이 알아보고자 합니다
집안의 제사를 장남이 꼭 지내야 할까요?
이제 얼마있지 않으면 청명한식이 다가오죠.
이때는 조상산소 손을 봐도 된다는 날이죠
물론 올해는 또 윤달이어서 이중으로 좋은 날이 될 것 같아요
곧이어 또, 제사도 다가옵니다.
기제사나 명절이 되면 제사이야기로 모두가 시끌벅쩍하지만 지내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가 돌아가고 정말 조용하지만
지내는 사람은 엄청 신경이 쓰이죠
그럼 이 제사란 무엇일까요.
물론 다 아시겠지만 이 '제(祭)' 자는 제사제자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나 양,
돼지 등 희생으로 쓴 고기를 손으로 바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글자라고 합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제물을 하늘과 땅과 조상에게 바쳐
나라와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고 복을 구하는 의식인데요.
제사의 근본은 자신의 존재 근원을 찾고,
친족 간의 우애와 혈연을 확인하는 자리랍니다.
집안의 제사를 장남이 꼭 지내야 할까요?
그런데 요즈음은 어떠한가. "자식은 다 같은 자식인데,
제사는 왜 장남만 모셔야 하느냐", "명절이 되면 여자들은
뼈 빠지게 일만 한다."라고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죠.
심지어 명절이 지나면 이혼율이 늘어난다고까지 하니
제사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크게 들리기도 하답니다.
그럼 제사의 역사를 한번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제사는 고려시대 말과 조선 중, 후기까지도 오늘날처럼
큰 아들(장자)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았답니다.
그때도 아들딸 구별 없이 재산도 똑같이 나누고 순서에 따라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맡아 지내는 '윤회봉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 예로 16세기를 무대로 『묵제일기』를 쓴 이문건(1495~1567년)은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내고 심지어 외손봉사까지 행했답니다.
또, 조선후기 문인 심노숭은 1801년에서 1806년까지
부산 기장에서 머무르는 5년 5개월 동안 매일 쓴 유배일기
『남천일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고 합니다.
동래 정씨 제례는 장자의 집이 아닌 여러 형제 집에서
부유한 사람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낸다.
이는 진실로 올바른 예절이 아니지만 또한 그릇된 것도 아니니
형세에 따라 적당한 제도를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 곳 풍속은 제례에 가묘와 신주가 없고 단지 위패만 세운다.
비록 사당이 없어도 적장자나 지자(支子:차자 이하의 아들)할 것 없이
모든 자손이 돌아가서 제사를 지낸다.
가령 세 명의 아들이 있으면 장자가 조부의 제사를 지내고,
차자는 아버지 제사를 지내며 ,셋째 아들이 어머니 제사를 지낸다.
이를 주관하다가 서로 바꾼다. 연해의 풍속은 모두 그러하다.라고
제사는 장자가 반드시 지내지 않음을 적시하고 있죠
이런 윤회봉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성리학이 사회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자
오늘날처럼 장자가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가 확고해지고, 재산도 아들 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누는 균등상속에서 차등상속으로 바뀌면서
제사도 윤회봉사에서 장남 단독봉사로 변화되었다네요.
집안의 제사를 장남이 꼭 지내야 할까요?
이제 우리의 상속법도 아들딸 구별하는 차등상속에서
균등상속으로 바뀌었으니, 제사도 장남한테만 지우지 말고 차례만이라도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어떨까 싶어지네요.
요즈음도 제주도를 비롯한 일부지방에서는 형제끼리
제사를 각자 맡아 지내는 윤회봉사를 한다고도 합니다.
실제 제사나 차례를 형제가 돌아가면서 지내면 순기능도 많다고 합니다,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생각과 제물에 대한 정성이 각별해질 뿐만 아니라,
장남에 대한 고충도 알게 되겠죠
비록 제사 때이긴 하지만 형님들은 동생 집에 갈 수 있어 좋고,
조카들도 큰집, 작은집을 오가게 되어 가족 간의 유대도
한결 두터워지는 것을 느낄수 있답니다.
그리고 제사를 몇 대까지 지내는가도 중요한 부분인데요.
한마디로 제사를 몇 대까지 모셔야 한다는 법은 없구요.
조상의 제사 대수는 예로부터 의견이 분분했답니다.
집안의 제사를 장남이 꼭 지내야 할까요?
우리나라는 관습적으로 4대 봉사를 당연시하지만
처음부터 4대를 제사 지낸 것은 아니죠.
유교식 제례를 처음 수용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만 해도
신분과 지위에 따라 봉사 대수가 달라 하급 관원과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다네요.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도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까지 봉사하고,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는데 이를 조선 왕조 법전인
<경국대전>에 명문화하여 거행토록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당사자의 신분에 따라 조상 봉사 대수를
결정했기 때문에 시행상 혼란이 따르게 마련이죠.
예를 들어 6품 관직에 있을 때는 3대까지 제사를 지내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관직이 없는 자식이 제사를 모시게 되면 부모 제사만 지내야 하는 모순이 생겼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반의 경우 4대까지 제사를 지냈는데요.
양반 숫자가 크게 늘어난 말기에는 일반 서민까지도 모두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왜냐구요?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 소리를 듣기까지 했으니깐요.
일제가 의례 준칙을 만들어 기제사는 부모와 조부모 2대까지만
지내도록 강제했지만 대부분 4대 봉사를 했죠
그러나 오늘날은 예전처럼 4대 봉사를 하는 집안은 그리 많지 않구요.
그래도 어느 누구도 상놈 집안이라 손가락질하지 않는답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인지 생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내가 죽으면
이것저것 차리지 말고 깨끗한 물 한 그릇만 떠 놓고 지내라"는 분과
내가 죽으면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유언처럼 말씀신분들도 많다고 하죠.
그리고 시대가 바뀌면 풍속도 변하듯, 민족의 신앙처럼 이어온 제사도
시대에 맞게 바뀌고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리라고 할수 있겠죠.
형제간에 돌아가면서 지내던 장자가 지내던 그것은 형편에 따라 하구요,
요즘은 형제가 있는 집안도 별로 없잖아요. 또 있더라도
형제중에 교회를 다니거나 멀리 떨어져 있으면 어렵구요
그리고 또 이젠 제사를 지낼 때 대(代)수마다 제물을 갈지 말고
제물도 나누어서 준비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서로 잘하는 음식을 하도록 해, 장남은 밥이랑 탕같은 것,
둘째는 고기와 적, 셋째는 나물과 떡, 다섯째는 전, 막내는 과일,
이렇게 형제끼리 각기 몫을 나누어 준비토록 하는것도 한번 생각해 봐야겠죠
집안의 제사를 장남이 꼭 지내야 할까요?
오늘은 과연 제사를 장남이 지내야만 하는지 그 유래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옛날 어르신들이 제사를 다른곳에 가져갈때는 반드시
조상님께 아뢰고 다른사람이 가져가라는 말도 있고,
어디서 지내더라도 귀신같이 찾아오니까 신경쓰지 말라는 분들도 계시죠.
어디서 지내든지 누가 지내는지 조상을 모시는 마음과 정성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이기도 한 조상님을 잘 모시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의무요 도리일수도 있잖아요.
정성껏 조상님 잘 모시고 형제간에도 우애있게 잘 지낼수 있도록
제사를 지내는 것이 최고랍니다.
끝까지 봐 주셔서 감사하구요. 구독도 꼭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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