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후 일본군을 물리친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여러분 김좌진 장군이라면 어질적 역사시간에 대 배웠죠
그렇지만 오늘은 김좌진 장군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합니다

1. 가계와 유년시절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라고 한다
그는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주군 고남면 갈산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이 그의 11대조이며
안동김씨 수북공파(水北公派)의 시조인 김광현(金光炫)이 그의 10대조가 되구요
그의 가문은 일명 ‘갈산김씨(葛山金氏)’라고도 한다.
그의 가문이 홍성에 정착한 것은 10대조 김광현이 홍주목사를 역임한 이후
홍주에 내려와 거주하면서 세거하게 되었고, 이후 후손들은 그의 호를 따서 안동김씨 수북공파라 하였다.
그의 문중은 홍성지역 최대 지주 중 하나였으며 홍성지역 사회운동을 주도했던 김연진(金淵鎭),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했던 김종진(金宗鎭), 홍주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金福漢),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金玉均)이 그 대표적인 문중인물이었다.
특히, 그의 친동생 김동진(金東鎭)은 1920년대 비밀결사인 주비단과 의용단에 참여한 후
홍성지역 사상단체인 무공회에 참여해 사회운동을 전개했고, 이후 만주로 망명해 김좌진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김좌진의 집안은 2,000석을 생산할 수 있는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80여 칸이나 되는 집에 노복 30여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김좌진은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그리고 열두 살 되던 해에는
형 경진(景鎭)이 판서를 지낸 김덕규(金德圭)의 양자로 입양되어 김좌진은 장남의 중책을 맡았다.
김좌진은 네 살이던 1893년 무렵 한문서당에 다녔고, 여덟 살이던 1896년 무렵
한문사숙(漢文私塾)에 입학하여 14·5세 때까지 배웠다.
그의 친구로 신간회 간부로 활동한 김항규(金恒奎)는 김좌진이 “한문사숙에 다닐 때부터
영재라고 부근에 이름이 자자할 정도 였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유학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김좌진은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노릇을 하였다.
특히, 병정놀이 시에는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고 썼다고 한다.
즉,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을 유년시절부터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삼국지 · 수호지를 통달할 정도로 읽고, 군사학에 관련된 책을 탐독하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런 강직한 성격 이면에는
약한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남루한 옷을 입은 친구를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걸인을 보면 밥을 먹이고 자신의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그는 유년시절 김광호(金光浩) · 김동익(金東益) ·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김광호 선생과의 만남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무인적 기질을 소유한 김좌진이 한문을 수학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노력덕분이었으며,
앞으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할 김석범(金錫範)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석범은 김광호의 조카로 김좌진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는 고향인 홍성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계몽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김좌진이 일찍이 계몽의식을 갖게 되는데 그의 영향이 컸으며,
호명학교를 설립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이후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지가 되었다.
김좌진은 김광호 선생이 개인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에 갈산면 부기리
김동익이 훈장으로 있는 부춘서당(富春書堂)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김동익은 부기리 자신의 집에 부춘서당을 개설해 교육사업을 벌였으며,
기호흥학회 홍성지회에 가입해 활동하고, 이후 갈산면 초대·3대 면장을 지냈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김복한은 1895 ~ 1896년 전개된 홍주의병의 총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항쟁과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 생애를 항일운동에 바친 민족지사였다.
김복한은 안동김씨 수북공파 대종손으로 비록 김좌진이 항렬은 높았으나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으며,
이것은 이후 그가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김좌진이 성장한 홍성은 한말 의병전쟁이 두 차례나 봉기했던 지역으로 항일의식이 드높은 지역이었다.
김좌진은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홍주의병을 목격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06년 홍주의병이 거병했을 때는 청년이 된 김좌진이
치열한 홍주성전투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그의 강인한 성격과 무인적 기질을 통해서 볼 때 홍주의병은 그에게 민족의식 고취를 가져오는
큰 사건이었던 것이다. 김좌진은 민족의식과 계몽사상을 형성한 후
우선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던 종들을 해방시켰다.
1905년경 집에서 부리는 한 여종이 천주교를 믿고, 어느날 교도 50명을 모아 김좌진의 집에 들어와
종을 내어 놓으라고 하니, 김좌진은 “너희들의 요구는 마땅하나 외국사람의 세력을 빙자해서
한다면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느낀 바가 있어 그 이튿날 종 30여명을 모아 놓고 주안을 배설하여 먹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분배하였다.

2. 호명학교와 교육계몽운동
김좌진은 국권회복운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노비해방을 단행한 이후에는
호명학교(湖明學校)의 설립에 참여해 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호명학교의 교명은 호서지역을
널리 밝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개화와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갖고 있었다.
호명학교의 설립에는 김좌진 뿐만 아니라 당시 홍성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던
안동김씨 문중에서 재원을 지원하고 참여했다. 김좌진을 비롯해 김병익 · 김병수 · 김병학 · 김선규 ·
윤필 등이 호명학교의 설립에 참여했는데, 이중 윤필을 제외한 인물이 모두 안동김씨 문중인물이었다.
호명학교 학생수는 1908년 100여명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고,
1908년부터 중등과와 소학과를 나누어 가르쳤다.
또한, 법률전문과를 설치하는 등 홍주지역에서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할 정도였다.
교과목은 1908년 호명학교에 사용했던 산술학교재가 전해질 뿐
어떤 교과목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호명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위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위국가의 내용은 학문에 정진하여 세계 맹주가 되어보자는 내용으로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내용이었다. 한말 사립학교의 교육이념이 1905년 이전에는 개명과 부강이었으나 신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의 이념으로
변화되었고, 호명학교가 이러한 교육이념으로 학생들을 교육했음을 알 수 있다.
김좌진은 노비해방과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한 후 1907년 부인 오숙근와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김좌진의 서울생활은 그에게 많은 교훈과 앞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데 있어 새로운 인물들과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상경한 이후 윤치성, 노백린, 유동열, 이갑 등과 접촉하여 새로운 군사학을 배우는데 전력을 다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사관학교와 구한국군인 출신이었고, 고전적인 군사학밖에 몰랐던 김좌진에게
일본의 군사전략과 군사학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김좌진은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학문 증진과
민중 계몽을 위해 1908년 1월에 조직되었으며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홍주지회는 1909년 1월 16일에 인가를 받았는데 회장에 서병태(徐丙台),
부회장에 김시원(金始元)을 비롯해 회원이 53명에 달하였다.
당시 홍주지회원 중에는 김좌진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다수 참여했는데, 그의 서당선생이었던
김동익과 호명학교 설립에 군수로서 지원했던 윤필,
그리고 1910년대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기필이 그들이다.
기호흥학회의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김좌진을 비롯해 호명학교의 설립 주체였던
김병익 · 김병 수 · 김선규 · 김병원이 그들이다.
이것은 판서를 지낸 김병익이 기호흥학회에 홍주지회에 가입했고,
이를 계기로 비용을 마련하는 등 직접 개입해 활동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보면 김좌진과 그의 문중인물들이 호명학교의 설립뿐만 아니라
기호흥학회 홍주지회 활동에 참여해 홍성지역에서 계몽운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3. 독립운동 거점마련과 대한광복회
3.1운동후 일본군을 물리친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김좌진은 국망이 되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먼저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사(染織會社)를 차려 해외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이창양행은 서울 관수동에, 염직회사의 경우 신의주에 설립했는데,
이것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해외와 연락을 취하기 쉬운
국경지역에 거점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였으며 책임을 이효식에게 맡겼다.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거점은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들이 비밀을 유지하면서
자금모집과 활동거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김좌진도 일찍이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자금모집과 연락거점으로 이창양행과 염직회사를 설립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경술국치 후인 1910년 음력 10월 안승구, 이영렬, 조형원 등과 함께
자신의 집에 모여 서간도 이주를 실현하기 위해 자금을 모집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김좌진은 이를 실천하기 위해 1910년 12월부터 안승구, 민병옥, 김찬수, 조형원, 남정면,
이영렬, 박종원 등과 함께 일곱 차례에 걸쳐 우성모, 남정철, 자신의 종증조부인
김종근(金鍾根), 오명환, 어호선, 신좌현 등의 집을 습격하여 자금을 마련하려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1911년 3월경 김좌진 등 일행은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런데 김좌진은 일경이 체포하러 오는 절박한 순간에도
태연히 동지들의 이름을 적은 비밀명부를 불태웠다고 한다.
1911년 5월 17일 경성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1911년 6월 30일 경성공소원 검사국에서 징역 2년이 선고되었다.
다시 항소하였으나 1911년 8월 2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좌진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이후 대동단에서 활동하게 되는 전협(全協)과 최익환(崔益煥)을 만났다.
전협과 최익환은 이미 만주에서 활동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활동하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난 상황이었고, 김좌진도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것이다.
김좌진과 전협은 서대문형무소에서의 인연으로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며,
최익환과는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함께 활동했는데
그 계기가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이루 어졌던 것이다.
최익환은 홍주군 주북면 평리(洪州郡 州北面 坪里) 출생으로
김좌진과 동향(同鄕)이었기 때문에 쉽게 의기투합했다.
이처럼 김좌진은 국망 이후 독립운동 거점을 마련하고 자금모집을 시도했으나 체포됨으로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김좌진은 1913년 9월 경 출옥하여 고향 홍성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낙향해서도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홍성헌병대에 10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김좌진은 옥고를 치른 뒤에 1915년 박상진(朴尙鎭) 등이 대구에서 조직한 대한광복회에 가담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 혁명기지 건설, 친일부호 처단, 무기구입,
독립군 양성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1910년대 대표적인 비밀결사였다.
대한광복회는 1913년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 우재룡, 강병수, 유창순 등이 조직한 풍기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윤상태, 정운일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음력 7월 15일에 결성된 단체였다. 이 단체의 총사령은 박상진이었고,
부사령은 신한촌에 머무르던 이석대(李奭大, 일명 李鎭龍)였다.
대한광복회는 만주 및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가들과 유기적인 연락을 맺으면서
조직을 확대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은 1916년 경 충청도 인사로 이에 가입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좌진은 자기의 친족인 김영진, 김세진을 가입시켰다.
또한, 그는 1917년 이석대의 뒤를 이어 대한광복회의 부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김좌진의 대한광복회에서의 활동은 만주부사령이었던 이진룡의 후임으로 파견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김좌진이 1915년 12월에 설치하는
길림광복회 조직에 참여했고, 평안도 · 황해도 지부원이었던 함께 이근영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보면 그는 대한광복회가 조직된 1915년부터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주요 활동은 군자금 모집이었다. 김좌진은 1915년 11월 최익환(崔益煥) · 이기필(李起弼) ·
감익룡(甘翊龍) · 신효범(申孝範) · 성규식(成奎植) · 강석룡(姜錫龍) · 성욱환(成郁煥) 등과
경성부(京城府) 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방법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이기필, 감익룡, 신효범은 1916년 3월 14일 경북 김천군의 자산가인
이진택에게 독립운동자금 2,000여원을 모집하여 간도의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하려 하였다.
1917년 3월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기필, 감익룡, 신효범만 재판에 회부되고 김좌진, 최익환을 비롯해
나머지 5명은 예심에서 면소판정을 받았다. 또한 재판에 회부된 이기필, 감익룡, 신효범은
경성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 과정에서도 김좌진과의 관련을 언급하지 않았다.
김좌진은 무죄로 풀려난 후 바로 활동을 재개했고, 이번에는 지폐를 위조하는 방법으로
군자금 모집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계획도 1918년 1월 관련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실패하였다.
이처럼 대한광복회가 결성된 후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던 시기에
김좌진은 군자금모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결국 대한광복회에서 자금을 모집하던 김좌진이 이 계획을 계기로 일경의 추적을 받게 되었으며,
때마침 만주 부사령인 이진룡이 체포되자 대한광복회는 김좌진을 만주 부사령으로 파견했다.
또한 김좌진의 화폐위조사건과 함께 대한광복회 조직망이 발각되어 1918년초 대부분이 체포되고
박상진, 채기중 등이 사형을 당하고 조직이 와해되었다.
다행히 만주로 파견된 김좌진은 체포를 면할 수 있었고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김좌진은 만주로 망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칼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내 쉬임 없이 피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
진정 님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만주로 망명한 김좌진은 1918년 12월 김동삼(金東三) · 박은식(朴殷植) · 이시영(李始榮) ·
이동녕(李東寧) · 신채호(申采浩) · 이세영(李世永) · 김규식(金奎植) · 이승만(李承晩) ·
이동휘(李東輝) · 안창호(安昌浩) 등 대종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39명의 독립운동가와 함께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 발표에 참여하고,
대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북로군정서(北路 軍政署) 등에 참여하여
3․1운동 이후 무장 투쟁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4. 만주 망명과 군자금모금
3.1운동후 일본군을 물리친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김좌진은 대한광복회에서 만주를 맡도록 파견되었다. 하지만 그가 만주로 파견된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 조직이 일제에 의해 와해되었다. 그러나 김좌진은 만주 망명 이후에도 국내와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것은 그의 투쟁방략이 군대를 양성하고 국내로 진공해 독립을 달성한다는 독립 전쟁론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무장투쟁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국내진공을 통한 독립의 쟁취였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은 이를 위해 국내에 특파원을 파견해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지원하면서 그의 투쟁방략을 실천에 옮겼다.
김좌진은 국내 비밀결사인 광복단 결사대와 암살단을 지원하였다.
광복단 결사대는 대한광복회에서 활동했던 한훈이 임시정부의 지원 하에 1920년 4월
모병과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고, 암살단은 김동순·김상옥 등이
1920년 경찰서 파괴, 조선인 순사 및 친일 조선인 처단, 조선인관리 퇴직강요 등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그러나 이 의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무기와 탄약의 구입이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이 바로 김좌진이었다. 김좌진은 주비단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주비단은 1920년 6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의해 조직되었고,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비밀결사였다.
주비단은 임시정부의 지원뿐만 아니라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와의 연계를 통한 활동도 전개했는데
그 연결고리는 김좌진이었다.
김좌진과 주비단의 연락은 주비단원으로 활동했던 김동진 · 김성진 · 김준한 · 김시현 등이 담당했다.
김동진은 김좌진의 친동생이며 김성진은 김좌진과 종질(從姪)관계였고, 김준한은 김좌진과 9촌 사이였다.
주비단원인 김시현과 김준한은 1919년 9월 중에 길림군정사에서 김좌진을 만났고,
이때 권총 등을 수령해 국내로 반입하였다.
김좌진은 국내진공을 위한 활동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김좌진은 1923년 3월 결사대원 김순갑(金淳甲) · 한경덕(韓敬德) 등을 국내로 잠입시켜
관공서를 폭파하고 고위관료 암살을 시도하였다. 또한 1925년 5월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신민부원에게 무기를 제공해 국내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 김좌진의 명령에 의해 한창걸 등이 국내진공을 시도하다 중국 관헌에게 마적으로 오인 받아
교전 후 무장해제 되기도 하였다. 1927년 8월에는 국내로 특수공작대를 파견해
작전지도의 작성, 민중공작, 일군경의 주둔 배치 등을 조사했다.
이 작전은 신민부군 장교 이중삼(李重三) 등 3명이 3개의 노선으로 나누어
평양, 전라도 지리산, 그리고 경성을 경유해 북청까지 이르는 노선을 따라 활동하고 공작을 완수하였다.
이 작전은 신민부가 실행한 작전으로 신민부 군정을 책임지고 있던 김좌진이 주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그가 만주에서의 활동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국내진공을 계획하고 실행했음을 알 수 있다.
김좌진은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에도 주력했다. 김좌진은 1919년 말 김영진(金瑛鎭)을 국내로 파견해
대한건국단(大韓建國團)을 조직하고 충청도·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자금을 모집했다.
김좌진은 김영진을 파견하기에 앞서 1919년 6월경(음력) 천경수(千景洙)를 국내로 파견해
조병채(趙炳彩)를 통해 자금모집을 의뢰한 상태였다. 이를 바탕으로 김영진이 국내로 파견된 후
자금모집을 위한 비밀결사로 대한건국단을 조직했던 것이다.
대한건국단원들의 판결문에 의하면 이들은 ‘길림에 있는 길림군정부독판 겸 총사령관 김좌진을 협조해
조선을 독립시킬 목적으로 자금을 모집해 김좌진에게 송부(하략)’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1920년 5월에는 김도심(金道深(본명:金基龍))을 국내로 파견했다.
김도심은 경성을 중심으로 자금의 모집과 자산가를 권유하는 목적을 가지고 파견되었다.
그는 1922년까지 경성에서 머물면서 윤치성 등과 접촉해 자금출자와 모금협조를 부탁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도만하여 김좌진으로부터 독립공채를 수령해
1923년 3월(음력) 국내로 잠입해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김도심은 자금 모집 시에 조해룡 · 서정두 · 박하진 · 박동지 등을 포섭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실질적으로 자금을 모집하지는 못했다.
김좌진은 1923년 5월(음력)에는 유정근을 국내로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북만지역에서 군비를 갖추고,
국내로 진격해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무기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때 김좌진이 가장 크게 중점을 두었던 점은 바로 보천교주 차경석을 만주로 도만시켜
그의 자금력을 비롯한 종교적 역량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보천교는 전국적으로 3만명의 교도가 있을 정도의 교세였고 교주 차경석은
300만원의 자금을 소유한 인물로 파악되었고, 그를 독립운동에 참여시킨다면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유정근을 파견한 목적은 일정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좌진은 1924년 봄 보천교로부터 2만원의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신민부도 보천교로부터 매년 상당의 보조를 받았다.

5. 북로군정서의 사령관 김좌진
김좌진의 초기 재만 활동은 북간도의 유력한 독립군단 중의 하나였던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에서 시작되었다.
즉 도만 즉시 이 항일 군단의 최고 지휘관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북로군정서의 무장군단을 이끈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고 해도
이 군단을 직접 설립한 인물은 아니다. 북로군정서 설립 내력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북로군정서는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3월 항일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북간도 왕청현(汪淸縣)에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이 발전한 독립운동단체다.
단체의 명칭을 ‘중광’이라 사용한 것은 단군교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대종교적 성격에 기인한 것이다.
이 단체는 단장인 서일(徐一)을 비롯하여 현천묵(玄天黙) · 백순(白純) · 박찬익(朴贊翊) · 계화(桂和) ·
김병덕(金秉德) · 채오(蔡五) · 양현(梁玄) · 서상용(徐相庸) 등이 조직을 이끌어 갔다.
하지만 조직은 갖추었지만 실제적인 군사활동은 전개할 수 없었던 중광단은 우선은
재만 동포사회에 대종교를 통한 민족의식을 심는 일에 주력하였다.
재만 한인사회를 견고히 다져가던 중광단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단체의 명칭을 정의단으로 고치고 무장 항일전을 실천할 수 있는 청장년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는 한편,
『일민보(一民報)』와 『한국보(韓國報)』 등을 발간하여 동포사회에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항일 독립군단으로 편성된 정의단은 1919년 8월에는 군정회(軍政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왕청현 춘명향 서대파구(春明鄕 西大坡溝)에 본영을 두었다.
본영 밑에는 북간도 각지에 5분단(分團) 70여 지단(支團)을 설치하여 군자금 · 군량미 등의 모집과 무기구입에 주력하여 북간도 내의 유력한 항일군단으로 발전하였다.
군정회는 다시 2개월 후인 10월 명칭을 군정부(軍政府)로 바꾸고
이 단체가 한민족의 독립군사정부임을 자부하였다.
그러나 다시 2개월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산하기관임을 자임하고
임정의 ‘국무원령 205호’에 의거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개칭하였다.
대한군정서는 서간도의 임정 산하 군사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구분하기 위해
북로군정서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 중광단에서 북로군정서로 발전한 이후 1919년 후반 국내에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부사령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김좌진이 이 군단의 사령관으로 영입되었다.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에 부임한 이후 군단의 장병들이 주둔하고 있는 서대파와는 별도로
왕청현 십리평에 부지를 확보하여 무관학교인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생도들을 양성하였다.
이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북로군정서의 당면 과제인 정예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이 연성소는 중광단 이후
이 단체가 추진하였던 대종교 포교과정에서 모집된 청년들을 주 훈련 대상으로 하였다.
개교 당시 생도수는 6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입학생도가 계속 늘어나
같은 해 9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당시에는 289명이었다.
북로군정서 무장 세력을 총괄 책임진 김좌진은 이 사관연성소의 소장까지 겸하여
훌륭한 무관들을 양성하기 위해 애썼다.
그의 밑에는 학도단장 박영희(朴寧熙)가 있었으며, 이장녕(李章寧) · 이범석(李範奭) ·
김규식(金奎植) · 김홍국(金弘國) · 최상운(崔尙云) 등이 생도의 훈련을 담당하는 교관을 맡았다.
교수과목은 군사학과 총검술 등이었고, 『보병조전(步兵操典)』, 『축성교범(築城敎範)』,
『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 『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 등이 교재로 사용되었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6월경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해주에 출병하였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매각한 무기를 그 동안 모금한 군자금으로 구입하여 본대가 있는 왕청현 서대파까지 운반해 들여왔다.
그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이들 무기를 지급받은 생도들은 심혈을 기울여
훈련을 받아 각자의 전투력을 높여갔다.
사령관 김좌진의 열성으로 이같이 사관연성소까지 운영하는
독립군단(獨立軍團)으로 성장한 북로군정서의 청산리대첩이 개전되기 직전의 진용은 다음과 같았다.
최고 통솔자인 총재는 중광단 이래 이 단체를 이끌어 온 서일이 맡았고, 부총재는 현천묵이 담당하였으며,
그 휘하에 서무부장 임도준(任度準), 재무부장 계화, 참모부장 이장녕, 사령관 겸 사관연성소 소장 김좌진,
사관연성소 교수부장 나중소(羅仲昭), 교성대장 이범석 등이었다.
그리고 이 군단이 보유한 전력은 독립군 약 1,600명, 군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등이었다.

6. 청산리대첩
3.1운동후 일본군을 물리친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청산리대첩은 한국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대첩이었다.
게다가 이 대첩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워 침입해 온
일본군 대병력을 맞아 승전으로 이끈 대반전의 전투였기에 더욱 빛나는 전투라 할 수 있다.
일제는 1919년 3·1운동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북간도에 독립군단을 조직해
끊임없이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는 재만 독립군들에 의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20년 6월 전개된 삼둔자(三屯子) · 봉오동대첩(鳳梧洞大捷)은 압록 · 두만강변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일제의 국경 수비대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따라서 일제는 그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식민지 한국을 경영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역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워
본격적으로 독립군들을 초멸시키고자 하였다.
이 작전은 조선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하고, 제20사단 · 포조(浦潮)파견군 · 북만주(北滿洲)파견군 ·
관동군 등을 서북간도에 침입시켜 실행코자 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 계략을 실현시킬 구실을 만들기 위해 우선 북간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마적두목 왕사해(王四海) · 동동(挏東) 등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그들의 훈춘(琿春) 영사관 분관을 습격토록 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중국측에는 한국독립군과 배일(排日) 러시아인 및 중국 관병이 섞인 무리가
그들의 영사관을 습격하였다고 억지 주장을 폈다.
같이 중국측을 협박한 일제는 그들의 영사관 및 거류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미리 대기시켜 놓은 대병력을 동서남북 사방에서 서북간도를 향해 침입시켰다.
즉 동쪽에서는 포조(浦潮)파견군인 일본군 제11, 13, 14사단이 간도를 향했으며,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되어 있던 안서지대(安西支隊)가 부대를 이동시켜 침략 작전을 개시하였다.
또 서쪽에서는 관동군 제19 연대 보병 1개 대대와 기병 제20 연대가 서간도 지방을 향해 침입하였다.
그리고 이 작전의 주력부대인 조선군 제19사단 및 제20사단은 남쪽에서 3개의 지대와 사단 직할대 및
국경수비대로 나뉘어 토벌대를 조직하여 북간도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 왔다.
이 같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간도로 침입한 일본군 병력의 총수는 제19사단에서 약 9,000명,
제20사단에서 약 700명, 제11사단에서 약 1,000명, 제13사단에서 약 1,000명,
제14사단에서 약 4,000명, 안서지대에서 약 1,000명, 관동군에서 약 1,200명 등
총계 약 18,000명에서 25,000명으로 헤아릴 수 있는 병력이었다.
한편 일제가 이같은 침략계획을 수립해 실행하고 있는 동안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은 이미 일제가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란 사실을 중국측의 협조와 첩보원을 통해 사전에 탐지하여 알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군측은 ‘피전책(避戰策)’을 써 일시 독립군 진영을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할테니
이에 협조해 줄 것을 중국측과 타협하였다. 중국측도 이 같은 제안에 협조하기로 하여
독립군들은 일제가 마적을 매수하여 훈춘(琿春) 영사관 분관을 습격하기 이전에
서북간도의 진영을 정리하여 울창한 삼림이 우거진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또한 다른 독립군단들과 마찬가지로 이동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북로군정서의 경우는 다른 독립군단들보다 조금 늦은 9월 20일경에야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는데 이는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을 끝내고 근거지를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사관 연성 기간을 6개월로 정했기 때문에 9월 9일에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로군정서는 289명을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한 후 그들을 훌륭한 독립군 인재로 만든 다음
병영을 정리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같이 일본군의 간도침입 그리고 독립군의 근거지 이동 중에 일어난 것이 청산리대첩이었다.
청산리대첩이란 단 한 번에 이루어진 전투가 아니라 약 10일간의 기간 중 독립군과 일본군 간에
대소 10여회 전개된 대첩을 가리킨다.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비롯해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그리고 한민회(韓民會)와 의군단(義軍團) · 신민단(新民團) 등이 연합해 결성한 연합부대와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나
북로군정서 단독으로 전개한 독립전투들이 총망라되어 청산리대첩이 된 것이다.
일제 침략군들은 간도 여러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독립군단들을 습격하기 위해
전병력을 훈춘(琿春) 방면(기림지대:磯林支隊), 왕청(汪淸) 방면(목촌지대:木村支隊),
용정(龍井) 방면(동지대:東支隊) 등으로 침입시키기 위한 3개 지대로 나뉘어 세 방면으로 들어왔다.
이중 용정방면으로 들어온 일본군 육군소장 동정언(東正彦)이 이끄는 동지대(東支隊) 소속의
산전(山田) 연대가 북로군정서와 1920년 10월 21일 아침 백운평에서 첫 번째 전투를 치루게 되었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백두산으로 향하던 도중 일본군이 자신들이 향하는 곳의 맞은편에서
오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른 독립군단들의 지휘관들과 일전을 벌일 것을 협의하고
화룡현 삼도구(三道溝) 청산리 계곡안의 백운평에서 진을 치고 일본군을 맞을 태세를 갖추었다.
김좌진은 백운평 일대의 고지에 독립군을 전투편제로 이중 매복시켜 놓은 뒤 일본군을 매복
현장으로 유인하였다. 북로군정서의 부대는 2개의 ‘제대(梯隊:사다리꼴로 편성한부대)’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평소 훈련을 그다지 많이 하지 못한 보병의 일부와 비전투원으로 제1제대를 편선한 뒤
총사령관 김좌진의 지휘 하에 후방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사관연성소 졸업생으로 구성된 연성대를 중심으로 박격포·기관총대를 편성해
제2제대를 편성한 뒤 연성대장 이범석의 지휘 하에 최전선을 맡게 하였다.
교전지가 된 넓은 공지를 기준으로 우측 산허리의 1개 중대는 이민화(李敏華), 좌측 산허리의 1개 중대는
한근원(韓根源)이 각각 지휘를 맡았고, 정면 우측의 1개 중대는 김훈(金勳),
좌측의 1개 중대는 이교성(李敎成), 그리고 정면 중앙에는 이범석이 지휘를 맡아 매복하였다.
북로군정서군이 매복한 계곡은 청산리 안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는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어 이 골짜기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 공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독립군이 매복한 지형은 공지를 바로 내려다보는 깎아지른 절벽 위였다.
그 가운데 이민화 부대가 매복한 우측은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부대가 매복한 정면 우측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절벽이었다.
산전(山田)연대의 전위부대인 안천(安川) 소좌가 이끄는 1개 중대는 독립군 매복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21일 아침 8시경 백운평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1시간 만에 공지까지 깊숙하게 들어 왔다.
일본군이 최전선의 독립군 매복지에서 불과 10여보 정도까지 근접했을 때 김좌진은 공격명령을 내렸다.
명령이 떨어지자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은 일본군을 향해 일시에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안천(安川) 전위부대는 독립군의 공격에 대한 응전을 시도했으나
매복장소 조차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곧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독립군들은 30여분 동안 집중사격을 가한 결과 200여명의 전위부대 전원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안천(安川; 야스카와) 전위부대의 전멸에 뒤이어 백운평 방면으로 뒤따르던
산전(山田; 야마다) 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 · 산포(山砲) 등의 중무기를 앞세우고
백운평 교전지를 향하여 돌격해 왔다.
그러나 주력부대 역시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공격을 받게 되자
수많은 사상자만 속출하였다. 그러자 산전(山田) 연대는 보병과 기병으로 몇 개의 중대를 편성하고
독립군을 협공하기 위해 고지를 따라 돌격하면서 우회하였으나
절벽위에서 사격하는 독립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산전(山田) 연대는 끝내 백운평에 다수의 시체만 남겨둔 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3백명에 가까운 일본군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리며 대승을 거두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이들 퇴각하는 산전(山田) 부대를 추격하지 않고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즉시 이동하여 갑산촌(甲山村)을 향해 행군하였다.
병력을 보충 받아 진로를 차단하고 공격을 가해올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백운평전투 후 행군을 시작한 북로군정서군은 22일 새벽 2시를 넘어
이도구(二道溝)의 갑산촌(甲山村)에 도착하였다.
이 때 독립군들은 갑산촌의 한인 주민들로부터 인근의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사령관 김좌진은 독립군들을 다시 재촉하여 1시간가량을 행군한 끝에 천수평에 당도하였다.
이곳에는 일본군 1개 중대 120여명의 기병이 독립군이 접근해 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김좌진 사령관은 독립군들에게 이들을 완전히 포위하게 한 다음 일제히 공격을 가했다.
깊은 수면 중에 불의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대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도 북로군정서는 탈출한 4명을 제외한 전원을 몰살했다.
북로군정서측의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17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전투는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랜 시간 격전을 벌인 전투다.
그리고 독립군측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만이 아니라 홍범도가 이끄는
연합부대도 합세한 2,000명이 넘는 전력이었다.
일본군은 자료의 한계상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어려우나 청산리로 향했던
동지대(東支隊) 소속의 보병 · 기병 · 포병 등 약 5천명이 넘는 전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랑촌전투는 어랑촌 한인마을을 중심으로 10월 22일 아침부터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독립군측의 작전은 먼저 천수평전투 후 이곳으로 옮겨온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어랑촌 후방의 고지를 장악하여 일본군의 진출로를 차단하고 다음으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같은 고지 최고봉에 포진하여 북로군정서를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월등히 우세한 전력과 화력만 믿고 희생을 무릅쓴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북로군정서 독립군이나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모두가 항전의식이 투철한데다가
지형상으로도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독립군은 돌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을 조망하는 가운데 조준사격이 가능하였다.
따라서 독립군들은 20여분 동안의 한 차례 공격에서만 30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반격을 단념하지 않았다. 기병과 포병, 그리고 보병부대를 총동원하여
독립군의 정면 및 측면을 일제히 공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공세를 적절히 차단해 가면서 효과적인 반격을 가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어 갔다. 시간이 갈수록 일본군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결국 그날 해질녘에야 쌍방간의 전투는 끝났고, 독립군들은 일본군들이 그들의 피해를
겨내지 못하고 철수하자 야음을 틈타 다음 지역으로 옮겨갔다.
어랑촌전투 후 북로군정서의 독립군들과 홍범도 연합부대 독립군들은 맹개골전투 ·
만록구(萬鹿溝)전투 · 서구(西溝)전투 · 천보산(天寶山)전투 · 고동하(古洞河)전투 등을 벌이며
애초에 목적하였던 백두산록 서쪽이 아닌 북만(北滿)의 밀산(密山)을 향해 길을 잡았다.
이렇듯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특히,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의 대표적인 전투인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주력부대였다.
청산리 전투에 참여했던 대한군정서 간부들 은 다음과 같았다.
사 령 관 : 김좌진(金佐鎭)
참모부관 : 나중소(羅仲昭)
부 관 :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 이범석(李範奭)
종군장교 : 이민화(李敏華)․김훈(金勳)․백종렬(白鐘烈)․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 홍충희(洪忠憙)
제 1 중대장 서리 : 강화린(姜華麟)
제 2 중대장 : 홍충희(洪忠憙)
제 3 중대장 : 김찬수(金澯洙)
제 4 중대장 : 오상세(吳祥世)
대 대 부 관 : 김옥현(金玉玄)
청산리대첩 후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명이 일본군 1300여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할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막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였다.
또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저지시켰으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투였다.
이처럼 김좌진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사관 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훈련이 잘 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총기 약 800정, 기관총 4정, 수류탄 약 2,000개, 박격포 2문을 갖추고 있어
무장이 구비된 정예부대였기 때문이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은 화룡현과 안도현의 경계인 황구령촌(黃口嶺村)을 지나
삼림계곡을 따라 왕청현 춘양향 신선동(春陽鄕 神仙洞)을 지나 11월 말경 밀산에 당도하였다.
곧이어 홍범도 연합부대와 다른 독립군단들도 속속 밀산에 집결하였다.

7.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과 자유시 참변
3.1운동후 일본군을 물리친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
청산리대첩 후 독립군의 집결지가 된 밀산에서 여러 독립군단의 대표들은 회의를 열어
장기항전을 다짐하고 연해주로 월경할 것을 결정한 뒤 당당하게 하나의 독립군단으로
진군하기 위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다.
이 같은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의 임원은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던 서일을
이 군단의 총재로 추대하고, 부총재에는 청산리대첩에서 혁혁한 지휘능력을 발휘하였던
김좌진과 홍범도, 그리고 조성환(曹成煥)이 선임되었다.
이어 총사령에는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에 는 이장녕(李章寧), 여단장에는
서로군정서의 사령관이었던 지청천(池靑天), 중대장에는 김창환(金昌煥)·조동식(趙東植)·
윤경천(尹擎天)·오광선(吳光鮮) 등이 선임되었다.
이같이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은 1921년 1월 초 일제의 연해주 침략군인 포조군(浦潮軍)의 경계를 뚫고
러시아 이만으로 진군하여 자유시(自由市: 알렉시예프스크)로 향하였다.
독립군들은 1921년 초 이만에 도착하였다.
당시 이만 부근에는 일본군은 아직 철병하지 않않았으며, 스파스크시 북쪽으로부터 우수리지역
경계선을 중립지역으로 삼아 극동공화국 정부군이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만은 일본군 주둔지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
이에 극동공화국 정부는 일본군이 조속히 철수하도록 요구하기 위해서는 독립군들이
그곳에 주둔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속히 자유시로 이동시키려 하였다.
문제는 극동공화국 정부측과 독립군 사이에 공식적인 군사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독립군이 자유시로 이동할 때까지 무장을 일시 해제시킨다는 극동정부측의 태도에 있었다.
이는 독립군이 무장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일본이 알게 될 경우 러시아와 맺었던 협정을 위반하고
한국 독립군을 공격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이만지역을 침공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만에서부터 일단 무장을 해제한 후 자유시에서 신무기를 공급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극동정부측의 통고를 듣고 홍범도와 지청천·김혁 등은 극동정부를 믿고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김좌진·이범석·나중소 등 북로군정서계통의 인물들은 독립군을 이끌고 1921년 3월 경 만주로 돌아왔다.
자유시까지 이동한 독립군들도 1921년 3월 말경 그 곳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그 곳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자유시에 주둔하고 있던
두 적계(赤系) 한인 무 장단체인 사할린의용대와 군정의회(軍政議會)의 싸움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측의 탄압까지 곁들여 독립군들은 1921년 6월 28일
한인(韓人)들끼리 접전을 벌인 대참극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게 되었다.
이 뜻하지 않은 참극으로 수많은 인명을 잃은 독립군들은 일부는 적군(赤軍)세력에 협력하거나
또는 포로가 되어 그곳에 남게 되고 나머지는 병력을 수습하여 북만지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북만주지역에는 이만지역에서 먼저 회귀하여 돌아온 김좌진은 밀산과 연안현(寧安縣)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갖추고 원 북로군정서의 대원들뿐만 아니라 자유시에서 돌아온 독립군
세력을 규합하여 힘을 넓혀갔다. 김좌진은 1922년 8월 북만의 독립군단들을 통합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8. 신민부의 결성
김좌진은 1925년 1월에 개최되었던 ‘부여족 통일회의(夫餘族 統一會議)’를 통해
동년 3월 10일 영안현 영안성(寧安縣 寧安城) 내에서 결성된 신민부에 주도적 인물로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좌진은 남성극, 최호(崔灝), 박두희(朴斗熙)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단의 대표로
참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회의에는 대한독립군단 이외에도 대한독립군정서 및
16개 지역의 민선대표(民選代表), 10개의 국내단체 대표 등이 참석하였다.
부여족통일회의를 통해 결성된 신민부에서 김좌진은 중앙집행위원회의
군사부위원장과 총사령관 직책을 맡았다. 이밖에 신민부의 간부로는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을
지냈던 김혁, 민사위원장에는 최호, 참모부 위원장에는 나중소, 외교부 위원장에는
조성환, 실업부 위원장에는 이일세(李一世), 심판위원장에는 김돈(金墩),
교육부 위원장 겸 선전위원장에는 허성묵(許聖黙) 등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김좌진의 지휘 하에 백종렬(白鍾烈), 오상세(吳祥世), 문우천(文宇天), 주혁(朱赫),
장종철(張宗哲) 등이 각각 무장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안대와 별동대 및 제1대대, 제2대대, 제3대대, 제4대대, 제5대대로 편성된 이 무장부대는
친일파 숙청과 마적에게서 재만한인사회 보호, 중국 당국의 횡포에 대한 견제,
국내진격작전의 전개 등의 활동을 벌였다.
신민부가 결성되자 김좌진은 목릉현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의 양성에 주력하였는데 당시 김좌진은 부교장으로 교장인 김혁을 도와
열악한 조건하에서도 약 500명의 청년들에게 항일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이 사관학교의 교관으로는 오상세, 박부희, 백종렬 외 5인이 있었으며, 고문으로는
이범윤, 조성환 등이 활동하였다. 김좌진은 1927년 8월 국내 진격 작전의 일환으로
김중삼(金重三) 등의 특수공작대를 국내로 파견하여 함경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지역의 주재소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였으며, 그 이전인 1925년에도 강모(姜某) 등의
신민부원에게 재등실(齋藤實; 사이토 마코토, 1858 ~ 1936) 총독의
암살의 명령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밖에 김좌진은 북만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친일단체인 보민회,
조선인민회, 권농회, 시천교 등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신민부에서 한인 자제들의 교육문제 해결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우선 1927년 8월 1일에
해림(海林)에서 ‘북만한인교육대회(北滿韓人敎育大會)’를 개최했던 신민부에서는
한인 자제들에게 독립정신을 교육하여 장래에 대비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를 위해 주하(珠河), 목릉(穆陵), 밀산(密山), 요하(饒河), 돈화(敦化) 등
15개 지역에 50여개의 소학교를 설치하고자 했다.
신민부에서는 북만지역 한인 자제들에 대해 의무교육(義務敎育)을 실시하는 한편,
이를 위해 1927년 10월 25일 북만 해림에 6년제의 완전한 시설을 갖춘 신창학교를 개교 설립하였으며,
각처에 지교(支校)를 두는 형태로 7세 이상 14세 이하의 한인자제들을 교육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신민부의 교육활동이 북만지역 전역에서 보다 조직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신민부는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군정파와 민정파로 양분되면서
갈등을 겪기 시작하였다. 보다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군정파와 우선 재만한인의 교육과 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사부의원장 최호(崔灝)를 중심으로 한 민정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김좌진은 1928년 12월 신민부를 해산하고 민족진영 단체의 새로운 통합을 위한
3부 통합운동에 참가한 후 혁신의회(革新議會)라는 새로운 조직을 잠정적으로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9. 김좌진의 민족진영 통합운동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의 갈등으로 문제를 야기하고 있을 때 민족진영의 독립운동 단체 내에서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를 통합하여 보다 강력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3부 통합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으며, 김좌진은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9월 길림성 신안(新安)에서 3부 통합회의가 개최되었으며
김좌진도 3부 통합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8년 11월 3부 통합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3부 통합회의가 무산되자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신민부 군정파와 참의부의 주류 및 정의부에서 이탈한
김동삼 · 이청천 등은 만주지역의 새로운 민족운동 단체로
1928년 12월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혁신의회는 만주지역 친일세력에 대한 공격과 합법적 자치권 획득을 위한 운동의 전개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혁신의회의 활동이 부진해지자 북만으로 돌아온 김좌진은 1929년 7월 21일 신민부 간부
16명과 함께 석두하자(石頭河子; Shitouhezi)에서 북만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하여
혁신의회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단체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김좌진은 한족총연합회는 무정부주의를 단체의 이념으로 수용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으로서는 북만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고
한인사회 내에서의 민족진영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1929년부터 1930년 4월까지만 보더라도 만주지역에서 한인 공산주의진영의 주도하에
한인농민들의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북만지역에서의 농민항쟁은 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화요파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는데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이러한 활동은
만주 지역 한인사회 내에서 그들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김좌진은 무정부주의 사상을 수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게 무정부주의 사상을 소개한 것은
집안 동생인 김종진(金鍾鎭)과 유림(柳林)이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좌진은 주의에는 주의로 맞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으나 어떠한 주의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남의 이론을 수용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적합한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좌진의 무정부주의 수용은 재만 한인사회 내에 퍼져가고 있던 사회주의 사상을 배격하기 위한
새로운 이념체계의 도입이었다는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도 김좌진은 특정 이념보다는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최우선시 했던
민족주의적 성향을 여전히 나타내고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한족총연합회가 결성된 이후 김좌진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가운데
1931년 2월 11일(음력 1930년 12월 24일) 41세의 나이로 고려공산청년회 및
재중한인청년 동맹 소속의 한인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에게 암살당했다.
김좌진을 암살한 박상실의 배후인물로는 김봉환(金鳳煥, 일명 金一星)이 지목되고 있었으며,
이 사건에 일제의 하얼빈영사관과 화요파공산주의 세력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31년 3월 31일(음력 2월 13일) 김좌진의 장례식은 전례 없는 성대한 사회장으로 치루어졌고,
그의 유해는 산시역 칠가둔 북쪽산에 안장되었다.
1934년 5월 21일(음력 4월 9일) 국내에 머물고 있던 부인 오숙근(吳淑根, 1887 ~ 1958) 여사는
홀몸으로 만주로 가서 김좌진의 유해를 박물장수로 가장하여 일경의 눈을 피해 고국으로 운구해 온다.
그리고 김좌진의 유해는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을 하게 된다.
1957년 2월 14일(음력 1월 15일) 오숙근여사가 사망하자 김좌진의 유해는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밀장지에서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 51번지에 합장하게 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0. 백야 김좌진 장군 추념비
1949년 대한청년단 홍성군단의 단장 주승진이 단내 임원을 위시하여 단원들의 성금을 모아
홍성 출생의 항일영웅인 백야 김좌진 장군의 추념비를 남산공원에 세웠다.
본래 이 자리는 1923년 일제에 의해 세워진 신명신사(神明神祠)가 있던 자리로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장소이다. 해방 이후 신명신사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청산리 독립전쟁의 영웅백야 김좌진장군의 추념비를 세우게 되었다.
제막식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이 참석하였다.

11. 백야 김좌진 장군 동상
1979년 5월 8일 홍성군에서 백야 김좌진 장군 동상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모금운동과 함께
지원금을 받아 총 9천1백50만원을 들여 1983년 5월 31일 현재 홍성군
홍성읍 고암리 오거리에 완공하였다.
백야 김좌진 장군이 31세 때에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 시킬 때 무장의 위용을
독립군 대장의 늠름한 기상을 표현한 동상이다.
비둘기상의 부조좌대에는 사관생 400명을 양성하던 독립 의열상과
청산리 전투의 승리상과 함께 단장지통(斷腸之痛) 시가 조형되어 독립군 대장으로서
김좌진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12.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
1992년 국비와 도비를 지원받아 성역화 사업으로 터만 남아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를 복원하고
사당 백야사를 지었다. 고증을 거친 김좌진이 살던 집은 안채와 사랑채, 광과 마굿간으로 이루어졌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목조기와로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왼쪽부터 2칸은 부엌, 안방과 윗방 각 한 칸,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리고 오른쪽 맨 끝으로 방 한 칸이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안마당쪽은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마루식으로 만들었다. 사랑채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인데,
한쪽은 통칸의 대문 출입구를 만들고 그 옆에 2칸의 방과 툇마루를 만들었다.
안마당 한곳에는 우물이 있고 마굿간은 화장실과 마구 각 1 칸씩 3칸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와 함께 성역화사업으로 백야 김좌진 장군 전시관도 조성되었다.
1989년 12월 29일 충청남도 도지정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었다.

13. 백야사
백야사는 김좌진 장군 사당으로 1991년 백야 김좌진 장군 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며
생가복원·주변정화와 함께 조성되었다.
사당 1동, 재실, 내삼문, 외삼문 등이 신축되고 주차장이 조성되었다.
재호는 백야 김좌진이 와룡천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의미를 부각시켜 와룡제(臥龍齊)라 했고,
중국 화룡현에서의 청산리 대첩을 기리는 뜻으로 외삼문을 화룡문(和龍門),
내 삼문은 청산문(靑山門)으로 하였다.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다가 2004년부터 백야 김좌진 장군 정승기념
백야축제가 열리는 10월 25일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식물(동물)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섬모양이 오동나무잎을 닮았고 오동나무가 많아 오동도라 불리었는데 누가, 왜 그 오동나무를 베었을까? (45) | 2024.05.30 |
---|---|
사망시 관에 많이 사용하는 오동(梧桐)나무의 유래와 의미, 용도는? (49) | 2024.05.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