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본관성씨(10), 청주한씨(淸州韓氏)
우리나라의 본관성씨를 알아보는 시간, 오늘은 그 10번째 시간으로
우리나라에서 열 번째로 인구가 많다는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의 유래와 분파, 특징, 역대 주요인물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씨(韓氏)는 기자조선에 연원을 두고 있죠.
위만에게 밀려 마한으로 온 준왕(準王)[기자(箕子)의 40대 후손]의
8세손인 원왕(元王)은 3형제를 두었는데요
이때 8대 원왕의 세 아들은 고구려와 백제, 신라에 각각 귀의했는데요.
우평은 북원선우씨(北原鮮于氏), 우성은 행주기씨(幸州奇氏)가 되었구요,
둘째 아들인 우량(友諒)이 신라의 상당(上黨)[청주의 옛 지명]으로 옮겨
한씨라 칭하였다고 전한답니다.
우리나라 본관성씨(10), 청주한씨(淸州韓氏)
청주한씨는 단본으로 고려초부터 명문으로 부상하여
조선조에는 문과 합격자가 273여명에 이르리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씨족이구요.
2015년 통계조사 결과 752,689명으로 10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씨입니다
이러한 청주한씨는 그 출발점을 기원전 115년 당시의 기자조선으로 하는데요
기자조선 마지막 왕인 41대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금마(전북 익산시)에 마한을 세우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했죠.
그 뒤 마한도 백제 온조왕에게 망했는데요.
따라서 선우씨나, 기씨, 한씨는 모두 기자의 한 핏줄을 받은 후예라고 할수있죠.
우량의 31세손인 한지원의 네 아들 중 한 란(韓蘭)이 바로 청주한씨의 중시조입니다.
한 란은 고려 태조 때 삼한통합에 공을 세웠습니다.
청주한씨의 중시조인 한란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이 있으므로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청주 방정리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하죠.
현재 방정리(方井里)의 행정구역은 방서동으로 되어 있는데
방정이나 방서보다는 ‘대머리’란 이름으로 통용된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대머리한씨’라 부르게 된 유래는
분명한 것은 아니나 대머리란 말은 대인을 의미하는 ‘大’와 ‘멀(마을의 방언)’과의
합성어이고 ‘대멀’은 변음되어 대머리로 불렸다고 합니다.
즉 시조인 태위공(太尉公)과 같은 큰 인물이 살던
마을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한 란의 아래대에서는 30여 파로 갈리는데요.
그 중에서 번창한 파는 양절공(한확), 문정공(한계희), 충간공(한리),
몽계공(한철중), 관북(한연), 충성공(한명회) 등 6파로 이를‘한씨 6파’라 부른답니다.
한 란의 12세손 한상질은 태조의 진문사로
명나라에 들어가‘조선’이란 국호를 받아 온 인물이죠.
그는 계유정난의 주인공 한명회의 조부입니다.
한명회는 조선조 한씨 융성의 큰 길을 연 인물이라고 합니다.
또,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에 가담, 단종과
그 추종세력들을 물리친 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영의정에까지 오르게 되었구요.
세조에 이어 예종과 성종을 섬기면서 ‘남이의 옥사’사건 등 4차례의
크나큰 역사적 사건의 중심세력으로 활동한 인물이랍니다.
한명회 당시 한씨 일문은 10촌 이내의 친척만도 17명이 조정 핵심부에 등장합니다.
영의정을 비롯해 좌·우의정에 오르거나 판서를 지내는 등
참판급 이상의 요직에 올랐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 최대의 명필가 한석봉은
조선 후기의 추사 김정희와 함께 조선 서예사의 쌍벽을 이루고요.
만해 한용운은‘님의 침묵’으로 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시혼을 심어주었죠.
그는 근세 백년 최대의 불교인이자 민족주의자랍니다.
구한말 한규설은 애국지사이자 정치가로 독야청청했던 인물이구요.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도 청주한씨가 배출한 인물이죠.
그는 천형(天刑)의 한 속에서 인생의 절망과 슬픔을 담은 ‘보리피리’의 주인공으로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 경기도청에 근무 중 나병에 걸려 방랑의 길을 나섰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이 시는 소록도로 가는 길에 읊은‘전라도길’이죠.
한하운은 자신의 불행했던 생애를 시로 아름답게 승화시킨 인물이랍니다.
상해 임시정부 요원이었던 월봉 한기악 선생은 초기 한국 언론계의 인물입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했죠
그 뒤 동아일보 창설 당시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뒤
시대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습니다.
우리나라 본관성씨(10), 청주한씨(淸州韓氏)
현대 인물은 한감석(제헌국회의원), 한갑수(한글학자), 한광옥(국회의원),
한말숙(여류작가), 한승수(상공부장관), 한승헌(변호사, 국정원장),
한신(합참의장, 예비역대장), 한심석(서울대총장), 한완상(서울대교수),
한철수(육군대장), 한병선(서예가) 씨 등외에 그 외 많은 인물이 있죠
청주한씨 집성촌은 정랑공파 계열의 23세손 한진영(韓震英)이
1618년(광해군 10)에 청주 방정리에 터전을 찾아 복거하면서
현 상당구 방서동,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 일원에 대머리한씨의 집성촌이 형성되었으며,
번영한 때는 200여호였고, 현재는 93호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또한, 절제공파 계열의 18세손 한윤형이 중종 때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가좌리와 양촌리로 세거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하죠.
그 외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사면 북성리, 경남 진주시 이반성면 평촌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촌읍 함덕리, 경북 고령군 우곡면 대곡리,
평남 평원군 동암면 용우리, 평남 용강군 용강면 후산리,
평북 영변군 오라면 세죽동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요파는 서재공파, 문열공파, 문간공파, 서원군공파 등이랍니다.
우리나라 본관성씨(10), 청주한씨(淸州韓氏)
본관 청주는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구요.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습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죠.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上黨區)로, 서부는 흥덕구(興德區)로 승격하여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습니다.
청주가 본관인 성씨는 다른 성씨도 많은데요. 대표적인 성씨로는
갈(葛),경(慶),고(高),곽(郭),궉(),근(斤),김(金),돈(敦),동방(東方),박(朴),
배(裵),석(石),손(孫),송(宋), 신(申),양(梁),양(楊),류(柳),유(劉),윤(尹),
이(李),임(林),장(張),좌(左),정(鄭),조(趙),준(俊),지(池),최(崔),
한(韓),허(許),황(黃)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청주한씨의 시조 한란의 묘역은
충청북도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묘소와 신도비가 있죠.
그리고, 청주한씨시조제단비는 상당구 운동리에 1605년에 세운 비로
비문에는 시조 한란과 그 후손의 내력을 적고 유기(遺基)를 찾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본관성씨(10), 청주한씨(淸州韓氏)
오늘은 우리나라의 본관성씨를 알아보는 시간, 그 열번째 시간으로
청주한씨 시조의 유래와 분파, 특징, 역대 주요인물, 본관지등에 대해 알아보았고요
다음에는 안동권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하구요. 구독도 꼭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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