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성어, 속담

의지도 없고 아무생각이 없는 어영부영과 어영청의 유래~

청하인 2022. 11. 2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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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도 없고 아무생각이 없는 어영부영과 어영청의 유래~

어르신들이 아무런 의지도 없이 되는대로 행동하는 모양이나

뒷짐지고 아무생각없이 있는 사람보고 어영부영하다고 말을 하죠.

그래서 오늘은 이 어영부영의 유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내용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의지도 없고 아무생각이 없는 어영부영과 어영청의 유래~

우리나라 말은 참 재미있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뜻을 모르는 체 그냥 어디서 듣거나

또는 느낌으로 이야기 할 때도 많다고 하죠.

 

여러분 어영부영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렇다면 도대체 어영부영이란 말을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아들! 시험이 내일 인데, 공부 안하니?"

"지금까지 공부하다가 잠시 머리식히는 거라구"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보내다가 지난 번 처럼 또 시험 망칠려 그러니!!"

 

어느 집에서나 있을 수 있는 엄마와 아들의 대화이구요.

그렇지만 이럴땐 엄마가 화가 많이 났겠죠?

근데, 이 어영부영이라는 말을 엄마가 썼는데요. 그 정확한 뜻은 뭘까요?

어영부영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보면 뚜렷하거나 적극적인 의지가

없이 되는대로 행동하는 모습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근데 이 말의 유래는 매우 슬픈 우리의 역사에서 기인된 말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한번 파헤쳐볼까요

어영부영은 조선시대 군대인 어영청에서 유래를 했다고 하는데요.

어영청은 조선 후기 중앙에 설치된 오군영 중 왕을 호위하던 군대였으니깐

당연히 군대 기강이 매우 엄격한 정예부대였겠죠.

 

근데 조선말기 고종때 군기가 매우 문란해져 병기마져도 낡아

도저히 군대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불량해 지고 말았답니다.

 

만약 어영청이 굳건하게 그 군기를 유지했다면 우리나라의

역사가 또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이런 군기 빠진 어영청을 보곤 백성들은 한숨을 내쉬며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라고 비꼬면서 이를 보고 "어영불영 御營不營" 이라고 했답니다.

이 어영불영 (御營不營)이 나중에 어영부영으로 바뀌어 오늘날에 이르렀다네요.

그러니 그말은 참 가슴 아픈 말이죠.

 

아무런 의지도 없이 되는대로 행동하는 모양을 일컫는

'어영부영'은 조선 군대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거죠

어영군의 유래를 좀더 자세히 헤쳐볼까요

조선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이후 특수부대인 어영군을 만든답니다.

집권 서인 세력의 무력 기반을 강화하고 왕을 경호하는 게 창설 목적이었죠.

 

260명으로 출발한 이 부대는 포격 훈련을 주로 받았구요.

포는 조총이나 활, 칼 등을 능가하는 최신 병기였다고 하고.

이듬해 이괄 난을 계기로 부대 규모가 커진다네요.

 

이괄은 인조반정 논공행상에서 밀려 평안도 군사령관에 임명되자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구요.

인조는 어영군 경호를 받으며 충남 공주로 피신하는데요.

그곳에서 어영군은 산골 포수 약 600명을 흡수하게 되었죠.

 

반란군이 진압됐을 때는 전체 병력이 1천 명을 넘어섰구요.

이후 5천 명까지 증원하고 명칭을 어영청으로 바꾼답니다.

물론 주력 부대는 총이나 포로 무장한 사수와 포수였구요.

근접전을 맡는 살수병도 양성했다네요.

살수병은 초승달을 닮은 칼과 무거운 쇳덩어리, 타격 도리깨 등으로 무장했습니다.

 

이어서 아들 효종이 즉위하고서 어영청 편성과 성격이 크게 달라지게 되는데

1652년에는 전체 병력이 21천 명으로 대폭 확대되었는데

이는 청나라에 당한 수모를 설욕하려는 조처였답니다.

 

인조는 1637년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삼전도 굴욕'을 겪었죠.

어영청 전략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고

병력은 특수훈련을 받은 직업군인으로 편성했죠.

 

청나라 기병인 팔기군에 대응하려고 신무기도 개발하였습니다.

수레에 화포를 싣고 다니다 적군을 만나면

곧바로 포격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전차라고 합니다.

 

병자호란 당시 팔기군은 하루 약 100km를 달릴정도였고.

임진왜란 때 왜군 북상 속도보다 무려 4배나 빨랐다네요.

어영청 전투력은 1654, 1658년 두 차례 나선정벌을 통해 가늠할 수 있었죠.

나선정벌은 청나라 요청을 받은 조선 조총부대가 러시아군과 중국에서 벌인 전투랍니다.

 

함경도에서 모집된 조총부대는 무기 성능이 뛰어나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러시아군에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사실 청나라 군대는 3년간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답니다.

 

이런 조총부대도 북벌 선봉 부대로 단련된 어영청보다는

전투력이 뒤졌을 것으로 추정되죠

어영청이라면 오늘날 우리나라 특전사에 비유되는 최정예 부대였기 때문이니깐요

그러나 북벌계획은 준비만 하다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끝내 무산되었는데요.

어영청은 주적이 사라지자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죠.

양반 자제로 구성된 지휘부는 주색잡기로 소일했고

병사들도 자연스레 오합지졸로 변했구요

 

1706년 이후에는 부대가 축소되고 이름도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고

1881년 첫 근대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된 후에는 극심한 차별까지 받더니

결국 3년 후 갑오개혁이 발표된 1894년 폐지되었답니다

당시 어영청은 기강이 문란해진 탓에 많은 지탄을 받았는데요.

군기가 풀린 어영청은 군대도 아니라는 뜻으로

'어영비영'‘어영불영이라는 말까지 나돌았습니다.

이후 발음이 어영부영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하네요.

 

우리나라 공공기관이나 공공기관 임원도 그렇죠?

공공기관은 국민 혈세를 투입해 공적 이익을 목적으로 설립했지만

본래의 목적달성보다는 자기편 알밖기에 몰두하다보니 경영은 엉망이고

부정과 비리의 온상이 되고 있죠.

이런 조직이 국정 혼란기를 틈타 어영부영하다 보면 조선 말 어영청처럼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는데

정치권들이 하는 당파싸움을 보니 정말 한심합니다.

 

회한을 지닌 나이가 지긋한 중년이나 노년의 삶을 사시는 분들에게

인생에 있어 언제가 제일 아쉬웠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젊은 시절 어영부영 시간을 나태하게 보냈을 때라고 한답니다.

 

그만큼 시간은 소중한 것이며 인생을 어떻게 차곡차곡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겠죠?

오늘은 어영부영의 유래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제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기 마시고 모든일을 단디 하시기 바랍니다

끝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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