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짓는다고 결혼은 반대하던 예비시모의 때늦은 후회 이야기!
오늘은 남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저희 집안과는 결혼시킬 수 없다고 하다가
우리집 재산을 파악하고는 납작 엎드려 결혼을 하자고 한 예비 시어머니 때문에
파혼하게 된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요즘은 둘만의 사랑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예전에는 둘만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두 집안의 사정이나 수준이 맞아야
결혼을 할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죠
바로 저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는데요.
저는 시골에서 농장을 하는 부모님 사이에 외동딸로 태어났습니다.
과수원도 있고, 소와 돼지등 가축을 키우는데요. 규모도 엄청 크답니다
그래서 당연히 어린시절을 시골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시골에서도 우리집은 농장을 운영하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를 주로 짖고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라고 성장하니, 다른 도시애들처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아닌,
논밭에서 일하시는 아줌마 아저씨들과 노는 저를 보는 부모님들의 마음은 편치 않으셨겠죠
농사짓는다고 결혼은 반대하던 예비시모의 때늦은 후회 이야기!
그래서 어렵게 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다니다가 부모님도 소중한 외동딸을
시골에서 교육시켜서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부산에 큰아빠와 함께 사시는 할머니 댁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아직 철부지이고
시골에서 자란 어린 저에게는 부모님과 떨어져 산다는 게 두렵기도 했습니다
물론 좋은점도 있었는데요. 시골에서 늘 혼자 놀던 저에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도 솔직히 많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산 생활은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시골에 있다가 도시에 가니 모든게 서투르고,
말투도 어른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를 사용하니,
시골에서 온 저는 친구들에게 촌년이라고 놀림받기 일쑤였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저에게도 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4촌오빠가 있었는데요
저보다 1살 많았던 사촌 오빠는, 제가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학교에서 보호해주곤 했어요.
사촌오빠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겨서 어릴적에 싸움도 잘 했나 봐요.
이렇게 오빠의 보호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오빠가 다니던 학교를 계속 같이 다녔는데요.
중학교에 가면서 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매일 오빠와 같이 다니는 시간이 많다보니,
중딩시절에 오빠와 절친한 친구였던 민수오빠를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민수오빠는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다 잘하는 그야말로 완벽한 팔방미남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빠의 절친을 짝사랑하게 되었으니,
그와 마주치려고 일부러 사촌오빠 옆에 딱 붙어 지내며 그렇게 설레는 중학교 시절을 보냈어요.
제 마음을 담은 편지도 몇 번 전달하여 친하게 지냈지만 사랑고백은 못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촌 오빠와 그가 다른 고등학교로 가게 되면서 저와는 볼수가 없었습니다
농사짓는다고 결혼은 반대하던 예비시모의 때늦은 후회 이야기!
요즘 같으면 휴대폰도 있어 전화라도 할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학생들은 전화가 없어 연락할 방법이 없는 시절이었죠
그래서 그 오빠를 사모하면서 언젠간 만날 수 있으리란
막연한 희망은 가졌지만 만날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도 서울에 대학을 다니게 되었는데요.
서울에서의 대학 졸업반이 되었을 때,
오랜만에 사촌오빠와의 약속 장소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되었죠.
사촌오빠 옆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던 그를 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지?
너~ 오랜만이네.은숙이구나. 나 민수오빠야.
이제 다큰 아가씨네 아가씨! 진짜 길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보겠다.
여전히 남들보다 키크고 팔방미인인 민수오빠가 아직까지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 모습에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어요.
아~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민수오빠 잘 지내셨죠.
10여 년 만의 첫사랑과의 재회 이후 , 저도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게 되었고,
저와 그 오빠는 급격히 가까워지게 됐어요.
그는 명문대를 졸업해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쉬는 날이면 저를 데리고 맛집 투어를 시켜줬고
어린시절 좋아했던 오빠와의 데이트는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만남은 짧고 이별은 길다고 했나요?
어느 날 엄마에게 걸려온 1통의 전화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죠.
평소 건강하시던 아빠가, 얼마전 병원에서 종합검진을 받고
췌장암말기라는 소식이었어요. 취장암은 오래못산다고 하는데다
이미 온몸으로 전이돼서 수술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평소에 술은 좋아하셨지만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빠가 정말 이렇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죠. 그후로 정말 일주일간은 눈물이 마르는 날이 없었어요.
아빠가 그렇게 되자 어디 가서든 여장부 소리 듣던 엄마조차도,
이 상황은 버티기 힘들어 보였어요.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아빠 본인이었는데. 평생동안 농장만 생각하며
가축을 돌봤는데 정작 본인 몸은 돌보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하셨어요.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약해지신 아빠는 얼마 버티지 못하셨습니다.
아빠가 그렇게 된지 3개월만에 엄마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시고 하늘나라로 가셨어요.
아빠의 마지막 한마디는 제 인생을 완전히 바뀌게 만들었습니다.
아빠의 장례식 직후 저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왔고
혼자 계신 엄마에게 농장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엄마는 제가 농장일 하는 걸 반대하셨지만, 제 의지는 확고했죠.
그 후 2년간 어떤 누구와도 연락하지도 않고 농장 일 배우는 데만 집중했어요.
그 결과 아빠의 발끝에도 못 따라가겠지만, 역시 남박사 딸답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어요.
농장일도 갈수록 자동화되고 있고 예전처럼 무조건적인 노동만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기에
여자인 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일하시는 아저씨들이 입 모아 말하시길, 이 모든 건 아빠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이라며,
남박사 덕분에 농장관리가 예전보다는 엄청 편해졌다고 해요.
정작 딸인 저는 지금까지 아빠가 어떤 삶을 사셨는지
몰랐다는 사실에 부끄럽기가 그지없었네요.
2년이란 시간이 저희의 상처를 보듬어 주기에 충분하진 않았지만
나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어요.
엄마도 예전의 여장부 모습을 되찾아 갔고요,
저도 화장품보다는 밀짚모자가 더 익숙한 농촌 아가씨가 되어 갈 때쯤
끊겼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와의 인연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2년전, 아무말도 없이 사라진 저였기에,
항상 그에 대한 마음은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겠죠.
그래서 서울에서 내려온 한동안 그의 연락을 받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도 포기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 오빠한데서 또 전화가 온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먼저 전화해준 오빠에게 고마웠어요.
그렇게 다시 이어진 인연에 서울을 오가면서 3년간 뜨겁게 사랑했어요.
점점 나이가 차 가는 딸이 농사만 짓고 있는 걸 걱정하던 엄마도,
제가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좋아하셨고 빨리 결혼해서 손주 보고 싶다 하셨어요.
말이 손주지. 사실 이 농사만 짓는 시골 생활을 제가 빨리 벗어나
보통의 삶을 살길 바라신 거죠.
그렇게 저만 바라보며 사시는 엄마에게도 남자친구는 든든한 사위가 되어 줄 거라 믿었어요.
제가 먼저 결혼 이야기를 꺼냈고 남자친구의 프러포즈를 받아 결혼을 약속했어요.
하지만 결혼은 단순히 사랑만으로 되는 일이 안된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처음 뵙게 된 시부모님과는 첫 만남부터 삐걱대기 시작했어요.
아버지 어머니 두분 다 시골에서 농장 운영하셨는데, 얼마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지금은 저랑 어머니랑 운영 중이라고 말씀드렸어요
뭐 농장! 농사짓는다는 말이니..
과수원도 하고 소와 돼지도 키운다고...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여보!가요 하면서 예비 시어머님께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습니다
저도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돼 버렸고,
남자친구 역시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어요.
남자친구는 집에 가서 부모님을 잘 설득해 보겠다고 걱정 말라며 저를 달랬죠
예비시모의 한마디에, 엄마 아빠가 평생 해온 일이 무시당하고
바닥에 내팽개쳐진 것만 같았어요.
그리고 얼마 후 예비 시모께서 한번 만나자는 전화가 왔는데요.
저는 이번 기회에 지난 번의 오해도 풀고자
급하게 서울로 올라가서 약속 장소로 갔어요.
그런데 예비 시모께서는 저를 보자마자 차갑게 말씀하셨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 나는 내 아들 농사짓는 집에 장가 못 보낸다.
내가 우리 아들을 어떻게 공부시켜서 대기업을 보냈는데
그런 천한 일 하는 집안에 장가를 보낼 수 있겠니?
우리 아들이 너무 순진해서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하시면서,
우리집이 천한 일 하는 집안이라고 말하는 예비 시모의 태도에 저도 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도 한마디 했는데요. 어머님 너무 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천한 일이라뇨.
왜 과수원하고 가축 키우는 게 천한 일이에요.
요즘엔 농장일도 다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어요.
그러자, 그래 봐야 농사는 농사지.. 옛부터 못 배운 사람들이나 하는 게 농사 아니냐?
내 말이 틀려? 아무튼 난 할말 다 했다. 우리 아들 더 이상 만나지 말아줬으면 좋겠구나.
너희 나이 때나 사랑 타령하지. 결국 조건 맞춰서 사는 거란다. 주제를 알아야지
예비 시모는 이렇게 자기 아들과 헤어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요.
그러니 나도 이런 취급받으면서 결혼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여전히 남자친구를 사랑했고 그 사랑 만큼은 변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때. 오랜만에 사촌오빠로부터 전화가 왔고 사촌오빠는 굉장히 이상한 말을 하더라구요.
은숙아! 너 혹시 민수랑 헤어졌니? 예비 시모와 이 일 이후 약간 서먹해지긴 했지만,
남자친구와는 별 문제 없었거든요.
아니 우리 아직 잘 만나고 있는데,..
그러자 오빠가 왜 이걸 내가 말해야 할지 고민 많이 했는데,
요즘 민수가 주말마다 선보고 다닌다더라
이번주에도 이번 주말 회사 일이 바빠서 못 본다는 오빠의 말이
갑자기 망치로 머리를 팡 하고 맞는 기분이었습니다.
너! 민수 엄마가 헤어지라고 했다면서..
내가 민수한테 쌍욕도 하고 달래도 봤는데, 나도 이제 민수 이놈이랑 인연 끊을 생각이야..
이미 사촌 오빠는 제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했는데,
저는 다른 것보다 제 결혼에 들떠있는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어요.
사촌 오빠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킨 뒤 남자친구에게 전화했죠. 나 은숙인데,
혹시 이번 주말에 올 수 있어요? 내가 이번주에 회사 일 때문에 못 간다고 했잖아.
왜 무슨 일 있어? 목소리 하나 안 바뀌고 거짓말하는 그이였지만,
이 믿기지 않는 사실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사촌 오빠를 통해 알게 된 그의 맞선 장소에 찾아갔어요.
그곳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기와의 결혼 때문에 지 엄마한테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지는 다른 여자와 선을 보고 있어? 오빠 여기가 회사야? 니가 여기에 왜?
너 나 미행 했니? 미행이고 뭐고 이거부터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랑 결혼 약속한 사람이 왜 선을 보고 있냐구?
나 선 본다고 참나. 친구사이라고 말해줬더니, 그걸 고새 일러바쳤네..
엄마가 너는 절대 안 된다고 엄마가 잡아주는 선 자리에 한번보고..
그래도 안되면 허락하겠다는데 나는 어떡하냐?
내가 나 좋자고 이렇게 선 보러 다니는 줄 알아..
오히려 저를 위해서 맞선을 봤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남자친구에게
들고 있던 커피를 얼굴에 뿌려버렸어요.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 됐는지
남자친구는 자신이 잘못했다며 한번만 용서해 달라며 매달리더라구요.
그런데 이미 제 마음의 문은 그에게 닫혀버렸었죠. 중학교 때 시작한 짝사랑부터
3년간의 연애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어요.
외동딸 결혼한다고 마을 잔치까지 여시겠다고 준비하는 엄마에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갔어요.
그 생각과 함께 이별의 아픔에 농장일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비 시모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사무실로 뛰어갔는데요.
아니 왜 저 사람이.. 농장 사무실에는 엄마와 그 여자가 앉아있나?.
저희가 헤어진 것도 모른 채 예비 시모를 농장으로 초대한 것이었어요.
사돈 아이들이 좋다고 하는데 결혼시키시죠.
제발 한번만 와달라고 해서 이 시골 촌구석까지 왔더니,
뜬금없이 사돈이라뇨? 저희 아들 이곳에 장가보낼 생각 없습니다.
급이 맞아야 결혼을 하죠. 사돈이 저희 집 농사짓는 집이라 반대하신다고 들었는데
딸아이 결혼시키면 농장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갈 생각이었어요.
서울에 제가 살집도 이미 마련해두었고딸아이 앞으로 아파트도 준비해 뒀구요.
그 여자는 엄마 말에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한다며 콧방귀를 꼈는데요.
시골에서만 사시니까 세상 물정 정말 모르시네요.
이런 농장 팔아서 무슨 서울의 아파트를 산다고요.
요즘 서울의 아파트가 얼마씩 하는지나 아세요.
사돈 여기 동네 들어오실 때 과수원 보셨죠?
거기서부터 저 뒤에까지 다 저희 농장이에요.
애 아빠가 죽기 전에 서울에 부동산도 여러 채 사둬서 우리 딸아이 앞으로 부동산도 꽤 되구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농사짓는다고 결혼은 반대하던 예비시모의 때늦은 후회 이야기!
엄마의 말을 들은 예비 시모는, 어머어머 그러셨구나,
사돈! 그것도 모르고 그냥 동네에서 농사짓는 분들인 줄 알았네요.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은데요,
우리 집에 장가보낼 수 없다더니, 우리집 재산 얘기를 듣더니,
아주 저희 엄마에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죠
이 역겨운 꼴을 더는 볼 수 없어서 사무실로 들어갔어요.
어머 우리 애기 왔니? 말을 하지 그랬니?
이렇게 큰 농장인 줄 생각도 못 했잖니?
지난 일은 다 잊고 우리 한번 잘 지내보자~
역겨워 정말~ 은숙아!
너 시어머니 될 사람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엄마 나 이 결혼 안 해. 나 이미 그 인간이랑 헤어졌어
미안해 미리 말 못하고 이런 꼴 보여서. 애기야 무슨 얘기니?
우리 아들은 아직 너 많이 좋아해. 너희 3년이나 사귀었다면서.
조건 맞춰서 사는 거라면서요. 주제에 맞게 행동하라면서요.
이제와서 보니 좀 아까우세요.
꼴랑 30평짜리 아파트 전세 살면서 아들 대기업 보냈다고 그렇게 급을 찾더니,
우리 집안에 비해 당신 집안 급이 너무 떨어져서 결혼 못하겠네요.
누구는 이런 말 못 해서 안 하고 사는 줄 아나?
농사가 천한 일이라고 옛부터 못 배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농사라고 하지 않았나요?
아주머니 무슨 대학 나오셨어요. 대학은 나오셨나요? 우리 아빠 S대 농대 나왔어요.
당신처럼 그렇게 편견 가지고 사니 그따위 밖에 못사는 거예요. 알겠어요.
본인이 급 떨어진다는 소리를 듣고도 제가 가진 재산이 아쉬웠는지,
그 여자는 모두 자기 잘못이라며, 자기 아들은 잘못이 없다며 용서해 달라고
사정하는 그 모습을 보니 참 한심하기 그지없더라구요.
농사짓는다고 결혼은 반대하던 예비시모의 때늦은 후회 이야기!
어릴 때부터 배우는 교훈인, 사람 겉모습만 보고 편견 가지지 말라,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을 왜 이리도 지키기가 어려운 것인지 엄마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며 농장을 정리하고 계십니다.
평생 아빠와 농장에서 일생을 바친다고 가보지 못한 크루즈 여행도 가고
유럽일주도 돌면서 남은 여생을 즐기고 계세요.
저는 그런 엄마를 보면 행복합니다. 엄마가 행복하니 저도 행복한 걸요.
제가 행복하면 엄마는 더 행복하시겠죠.
제가 한 사랑 때문에 엄마한테 상처 준 걸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엄마를 위해서라도 제 행복을 찾아 즐겁게 열심히 살아봐야겠습니다.
끝까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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